🌆 쪽빛의 심연

神曲 - R Sound Design

ハレハレヤ - 羽生まゐご - ver. Sou


 あいいろ     

藍色深淵





 

 

 

 

 

 

あいいろ      

藍色深淵

 

쪽빛 의  심연

 

 

 

 

 

 

 

 

 

 

 


1 

 



 

읽기 전에,

 

赤柚黃 본래의 해석과는 다르게 우울을 극대화시킨 IF 스토리입니다. 우울증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 해당 소재에 예민하신 분들은 읽음을 주의해 주세요.

 

현실서술에서 생각서술로 갈수록 문장 부호가 생략되며 비유적 지칭을 사용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에 자주 쓰이는 비유적 지칭 표현들을 정리합니다.

 

유즈하라 유카리 柚原 優香(유자 유), 유체(流體), 주홍

아카시 세이쥬로 赤司 征十: (붉을 적), 적색

키세 료타 黄瀬 : (누를 황)

 

 

48페이지, 2만 8백자

2019.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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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세계와 구원 밖의 사람도 없다 생존을 넘어 존재의 문제이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가의 영역 인간종의 몸뚱이에 갇힌 또한 그렇다 의 세계와 의 구원 없는 삶은 그릴 수 없다


하나 인간은 를 어떻게든 가시可視로 끌어내곤 한다


 전혀 상상은 되지 않지만, 는 갑작스레 관계의 끝이 올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사랑이란 것은 으레 그러하니. 그리고 만일 이 사랑에 마지막이 온다면 그것은 이제 그만 생을 내려놓고 싶은 날일 것이다. 구원과 세계인 사랑스런 나의 연인들, 말했잖는가 사람은 그를 떠나면 죽는다고. 생각을 넌지시 흘렸을 때 세계는 눈에 띄게 구원은 눈에 띄지 않게 불안해했다. 은 논리적이었고 은 현실적이었으므로 이상적인 는 그들에게 잡히지 않는 유체로 보였으리라. 는 연인들에게 기꺼이 속해 있다 날아가지도 흩어지지도 않은 분명한 형체

 

 


3  

 



 

로. 하나 간혹 그가 녹아내리어 보일 때면 손틈 새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착각을 감각하는 것이다. 의 유하하는 기질이 태생인지 후천인지 은 모른다. 알아온 시간이 스무 해에 근접하는 이가 그러하니 하물며 은 어떠하랴. 기억을 거슬러 오르면 진열장에 전시된 가 보인다. 무릇 유체란 담긴 그릇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니 가문의 속박이란 틀에 가둬져 있던 그의 속성을 몰랐던 것도 당연하지 싶다. 당시의 는 새장에 갇혀 죽어가고 있었다. 지치는 내색은 않았지만 확실하게 조금씩 시들던 그의 숨을 조른 것은 억압임이 자명했다. 구속을 벗어던진 주홍의 새는 생기로 만연해 이전에 본 적 없는 아름다움으로 반짝였으므로. 그렇기에 갈망하던 자유를 찾은 지금의 그가 어째서 간간이 사향死香을 흘리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스물의 어느 날 는 연인들 앞에서 우울을 고백했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것이 아주 드물게 찾아와 자신을

 

 


4 

 



 

두드리고 지나간다고 했다. 그것은 끄집어내기엔 너무 사소했고 교제 관계에서 침묵하기엔 그다지 사소하지 않은 정도의 크기였다. 그들은 이인離人의 부유*이 만연한 를 겪은 적이 거진 없다. 심지어 자신도 반평생 넘게 속박의 안온 속에 살아왔기에 이인의 병증을 앓는 자기가 생소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땅에 발을 붙인 채 살아간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내면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일면 현실감을 버리고 부유했다. 연인들은 그것이 여태껏 갇혀 있던 삶에 대한 반향인지, 아니면 혈족이 그의 본성을 알고 날아가지 않도록 지상에 묶어 제어했던 것에 불과한지 그 인과의 진위를 알 수 없었다.

 

 고백은 놀랍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의식적인 인지가 아니라 무의식중의 감에서 만들어진 반응이었다. 하나같이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니 이미 이전에 만일의 가능성 정도로 생각해 본 적이 있었거나,

 

 

각주: 이인증(離人症). 스스로가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서 분리되어 있거나,

또는 스스로의 관찰자가 되는 듯한 증상을 느끼는 것으로 우울증의 증상.

5  

 



 

사랑하는 이에 대한 것이니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거나 …… 혹은 그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거나. 어찌 되었건 새삼 놀라운 반응을 보일 일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태도는 기만이 아니었던가 싶다. 겪어본 적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다 지레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다. 자신이 아무리 잘났고 자신감에 넘쳐 살았다 하더라도 막상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결국 그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지금이 그랬다.

 

 본격적인 우울은 그들이 함께하며 겪었던 어떤 고난보다 깊고 암울했다. 두 남성의 심정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미리 경고의 언질을 내었던 본인조차 예측하지 못한 깊이의 심연이 그들을 덮쳤다. 지금까지 보아 온 그녀로는 상상조차 불가한 일들이 하나씩 현실로 피어났다. 연인들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그녀 혼자 감당

 

 


6  

 



 

하는 충동으로만 생각했지, 자신들까지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는 부유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벼움을 받아들여 바람이 이는 대로 공중에서 맥없이 흩날리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은 그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다. 양쪽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 그러나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柚는 며칠 새 놀랍도록 야위었다. 생기 없이 시든 분위기에선 사향이 풍겼다. 사향(死香)과 사향(麝香;musk)이 같은 발음을 가진다는 건 꽤 생각해봄직하다. 죽음과 생이 맞닿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매력적이며 눈앞의 연인은 한 몸에 두 모습을 모두 가져 실재하는 이상과도 같았으니. 연인의 시선에서의 관찰이라 객관성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녀는 분명 죽음에 가까워지는 양을 하였어도 흉하긴커녕 사향麝香의 관능처럼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드럽기보다는 위태로워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그런 향이었다.

 

 


7  

 



 

 처음에는 미세한 답답함으로 지금은 확연한 숨막힘으로 확장된 무력감의 장막은 우리들을 완전히 감싸고 생활 전반을 무너뜨렸다. 낮에 행해지는 유즈하라의 밤은 지독한 불면의 연속이었다. 어떤 짓을 해 보아도 밤 내내 도저히 잠에 들지 못하다가 동이 트고 난 뒤에야 간신히 누워 해가 붉게 익을 즈음 일어났다. 며칠간 제대로 된 낮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겪지 못했고 햇빛을 맞은 기억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잠이라도 푹 자면 다행이건만 눈을 붙였다 하여 불면이 가시는 것은 아니더라. 악몽과 강박적인 기상이 번갈아 들이닥쳐 누워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반나절이어도 깨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때가 반이요 선잠에 앓는 시간이 나머지의 반이었다. 잔다는 이름만 붙어 있을 뿐 제대로 된 수면 없이 늘어지기만 하던 긴 시간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이제 그만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또 다른 압박이다.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기력에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만 할 뿐 여전히 누워 

 

 


8  

 



 

자신을 좀먹는 상념들만 전개한다. 주로 일상에 성실하던 과거의 자신과 의무를 내팽개친 불성실한 현재의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을.

 

 유즈하라가 항상 우울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친절했고 따스하게 웃었고 전과 같이 연인들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엉망이 된 방의 상태라거나 제대로 챙기지 않고 있는 식사 등 예전엔 당연했던 일상의 사소한 것들마저 이제는 연인의 도움 없인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증거들을 보고 있자면 밝은 모습들도 억지노력으로 꾸며낸 것은 아닐지 안쓰러워지는 것이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망가진 일상과 그 위의 애처로운 다정은 전쟁터에 핀 민들레꽃과도 같은 괴리감으로 마음을 저리게 했다. 비슷한 크기의 병을 앓는 일반적인 타인들보다 훨씬 의연한(依然) 체 조용한 모습을 하여도 연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무기력과 싸워 이겨서 침대를 벗어난 뒤에도 그녀는 

 

 


9  

 



 

여전히 고통의 한가운데였다. 깨어 있는 내내 부정적 감정들에 깊이 잠겨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괜찮음을 가장하더라도 그것은 기력을 소모하는지 잠시뿐 오래 이어지지 않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초점 없는 시선과 하나하나 멍한 느낌이 묻어나와 보는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행동들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때는 정말 괜찮아진 듯 연기의 기색 하나 없이 예전과 같은 맑은 정신이기도 했는데, 십중팔구 그런 날은 기분이 좋아 보이다가도 뜬금없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이유 없는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때로 울음은 눈이 발갛게 짓무르도록 끊임없이 쏟아졌고, 그런 날이면 지치지도 않는지 눈물이 마르고 난 뒤에도 내내 물기 없이 마른 울음을 지었다. 유즈하라는 점점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기본적 의무들을 내팽개치고 고차원적 권리만을 찾았다. 자신을 좀먹는 감정들에 기꺼이 잠긴다는 그 망할 예술적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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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점점 지식과 경험은 천지차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카시는 방종이 책임 없는 자유라는 것만 알았지, 우울과 자유가 만나면 방종으로 튀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은 몰랐다. 사전적 지식은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경험으로 얻어진 것들을 사전에 적어넣을 수 있음에 그나마의 안도를 느낄 뿐이다. 유즈하라의 우울을 난생 처음 대면해 보는 것은 아니다. 둘은 혹독한 가정 아래서 사랑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채 자랐고 유년기의 결핍이란 공백은 메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 새겨져 평생을 가져가야 하는 이 치유불가의 상처에 심리학자들은 ‘조숙함에 의한 스트레스’라는 규정을 한다. 정제된 단어, 깔끔하기도 하지. 여기에 성인 만성 우울증의 기반이라는 수식까지 붙이면 단어는 더욱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워진다. 반면 실체는 전혀 깔끔하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상처를 가진 당사자에게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불쾌감이다. 기쁨의 빛이라고는 한 톨도 들이치지 않는, 공허만 가득한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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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타로스. 아픔이 담긴 싱크홀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우울의 조짐과 같았다. 구멍에서는 가끔 감정이 범람했다. 강압적 교육으로 마음을 감추고 웃음을 꾸며내는 데 강박까지 생긴 유즈하라는 매번 그 주변에 제방을 둘렀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녀의 곪은 우울을 알지 못했다. 단 하나, 같은 영혼을 가진 아카시만을 제외하고.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는 가끔씩 유즈하라에게서 부정적 감정들이 넘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 한 번도 제방을 넘은 적이 없었다. 어차피 유즈하라가 세운 둑에 가로막혔다가 사라질, 매번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사향死香이 물씬한 우울감은 제방을 넘기는 것을 넘어서 둑을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예상한 듯 최적의 대처를 내는 것이 아카시건만, 이번만큼은 경험도 예측마저도 한 적 없는 상황이 들이닥쳐 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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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굳게 만들었다.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상황에 대한 생소함과 아픈 연인에의 걱정으로 굳어있던 아카시 대신 먼저 행동한 것은 키세였다. 유즈하라가 마음을 진정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달래며 천천히 그녀의 이야기를 유도해 상태를 파악하는 모습에 아카시의 정신도 제자리를 찾았다. 참아오던 우울을 갑자기 터뜨린 그녀를 대하는 것은 처음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유즈하라의 연인들은 워낙 상황에 눈치 있게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었던지라 대처가 빠르게 좋아졌다. 본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주로 아카시의 몫이었는데, 이번에 주로 나서는 것은 키세였다. 유즈하라가 잠든 틈을 타 집안의 날붙이를 모두 내다 버릴 때 키세는 비교적 침착했던 자신에의 이유를 말했다. “모델계에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건너로 들은 것들이 꽤 있슴다.” 차분한 목소리에 안도감이 섞였다. ―다행이죠. 반면 동반된 웃음은 씁쓸했다. ―그렇네.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키세가 우울증에 관한 정보를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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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어왔던 것도, 아픈 유즈하라의 곁에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도. 완벽에 가까운 남자 아카시 세이쥬로, 그와 같은 영혼을 공유하는 완벽한 이해자 유즈하라 유카리. 얼핏 보기엔 둘이서 하나로 완전할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키세 료타까지 포함된 셋이 가장 완성된 구조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부분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고, 이번 사건 또한 그 사례 중 하나가 되리라.

 

 아카시와 유즈하라는 부유 속의 결핍을 지녔다. 미처 채워지지 못한 공백에는 어머니에 대한 적색의 초상과 교만이라는 주홍의 글씨를 그려 넣었다. 얻지 못한 것들에 대한 소리 없는 내면의 외침. 아이에게는 너무 이른 죽음에 대한 고찰, 넘치는 재능을 어째서 숨겨야 하는지에 대한 답답함,  어른스러움에 대한 압박,  팔리기 위해 진열되는 패랭이꽃*,  상실된 모성에의  그리움   얻지 못한 자유 에  대한  비정상적갈망   완벽함   조신함   승리   내조 ―― 

 

 

각주: 야마토 나데시코(大和撫子). 남존여비에서 비롯된 일본 전통 여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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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알아, 어머니? 난 가끔 마음껏 추억/교만 하고 싶었어.’ 소리가 없기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평생 닿지 앟을 언어들. 안에서만 부딪히고 곪다가 결국엔 무음無音을 들을 수 있는 서로에게만 품어지는 감정들. 의 불완전한 부분은 이 채우고 에게 미숙한 감정은 가 대신한다. 편중(偏重)된 시야에서 둘은 미달이 충족되어 완전한 1이 되는 관계지만, 멀리서 전체를 조망하면 하나와 하나를 더해 둘 미만을 만드는 불완전 연산이었다. 비효율 비합리의 극치, 그러나 대신할 자가 없어 부득이하게 완전으로 이름붙여진 공식. 그것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불가침이지만 더 이상 유일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의 공식 옆에 새로이 쓰여진 의 공식은 아마도 불완전 연산은 아닐 테다. 유즈하라는 이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는다. 아카시는, ……생각을 멈춘다. 상대방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는 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같은 듯 보여도 별개의 문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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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침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있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역할 분담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안에서 유즈하라의 감정을 돌보는 쪽은 거의 아카시였고, 밖으로 돌며 먼저 행동하는 것은 주로 키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미숙했지만 변화된 생활은 순식간에 익숙해졌다. 망가진 집을 정리하는 것도, 감정에 휘둘리며 힘들어할 때 달래는 것도, 약을 챙기고 상태를 관찰하는 것도. 처음 수면 유도제를 타 온 날에는 집에 있던 술을 모아 버렸다.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예쁜 병들이 한데서 무분별하게 뒹굴며 처량한 소리를 내었다. 아름답고도 처연한 음색은 그들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전과 달라진 모든 생활방식이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편하면서도 괴로웠다. 위험을 배제하고, 할 수 없어져 필요가 상실된 것들을 버리고, 집이 비워질수록 그 주인의 무게 또한 가벼워져 갔다. 유즈하라는 어느새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만 같은 연약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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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음악 앞에서만큼은 여전히 강했다. 불면과 무기력에 시달려 시들어 있다가도 작업실 건반 앞에만 앉으면 몸 안에 남아있는 기력을 전부 끌어모아 생기를 찾았다.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우울은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해악이 아니었다. 다만 혼미한 정신을 만들어 놀라운 집중력과 에너지를 끌어내는 트랜스 상태로 돌입하기 위한 원동력이 될 뿐이었다. 작업은 생명을 불태우는 것과 같았다. 막힘없이 손끝에서 자아내는 선율은 그동안 느낀 감정들을 그러모아 응축한 것처럼 분노와 우울의 극치였다. 우울의 한가운데서 익사 중인데도 우울이 함축된 음악만을 반복해 듣는 행위는 부정적 감정의 되새김질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슬픔을 덧씌우며 감정의 심연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는 행위는 자해와도 같아 보였다. 키세는 그 자기파괴적인 창조행위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카시는 이를 끔찍히 싫어했다. 그는 작곡 행위에 못마땅한 심정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증오까지 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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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 같았다. 아카시가 제 사랑을 빼앗아 간 연적을 질투 섞인 복수심으로 노려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미디(MIDI) 기계를 응시하는 것을 키세는 몇 번 목격하기도 했다. 이성적인 아카시가 기계에 미움을 품는다는 이상(異常)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서서히 함께 미쳐가고 있었다 적색 경보가 켜진다 그 누구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쌓이던 광기는 사소한 계기로 터졌다. 평범한 날의 저녁이었다. 촬영을 마친 키세는 소파에 몸을 누여 피로를 풀고, 일을 모두 끝낸 뒤 찾아온 아카시는 안락의자에 앉아 뉴스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오후의 한가운데 느즈막히 기상한 오늘의 유즈하라는 기분이 좋은 듯 그들이 제 집으로 찾아올 때마다 평온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 맞이해주었고, 이어 잠을 깨기 위해 샤워를 시작했다. 작은 긴장마저 늦춰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별다른 사건 없이 평화롭게 흐르는 일상. 여기에 부드럽고 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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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디워시의 향이 따끈한 증기에 섞여 문틈 밖으로 스며나오고, 끊김 없이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샤워기의 물소리가 백색소음으로 얹어지자 마음이 풀어지기에 알맞은 분위기가 되었다. 따듯한 물을 맞는 것을 좋아하는 유즈하라는 샤워 내내 물을 계속 틀어놓곤 했다. 이 때문에 굳이 외쳐 묻거나 안으로 들어가보지 않아도 매번 샤워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물소리가 끊겨 샤워가 끝났을 것이 분명한데도 한참동안 문이 열리지 않았다. 들리던 소리가 사라져 갑작스레 조용해진 집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지 않자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수건이 없나? 이 집의 욕실에는 항상 수건이 걸려 있다. 만일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하더라도 유즈하라보다 먼저 세면대를 사용한 키세가 있었다. 입을 옷이 없는 것일까? 그렇다기엔 밖에 있는 연인들에게 가져다 달라는 부탁 정도도 하지 못할 만큼 부끄러워할 사이는 이미 지났다. 더군다나 그들은 유즈하라가 

 

 


19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 목욕 가운과 새 수건 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음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정상적인 범위 내에서는. 이쯤 되자 당연한 수순처럼 안 좋은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키세는 유즈하라의 건강을 염려했다. 작게는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진 것은 아닌지부터 크게는 피로가 쌓여 갑자기 쓰러졌을 가능성까지. 아카시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이를테면 모조리 내다버렸던 날붙이가 어떤 경위로든 그녀의 손에 들어와 있다는 상상, 난자된 손목에 대한 망상, 문 너머에는 온통 으로 물들어 배수구로 흐르는 핏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걱정은 긴 시간동안의 일처럼 느껴졌겠으나 실상은 찰나였다. 몇 분 되지 않아 더 기다려볼 법도 했는데, 조급해진 아카시는 키세가 채 말리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아카시의 예측은, 비록 문이 열린 뒤 보인 장면에 피가 흐르고 있기는 했지만, 완벽히 빗나갔다. 유즈하라는 흰 가운을 단정히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올린 뒤 피가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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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얼굴을 세면대로 숙인 채 코를 누르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피로가 오래도록 쌓여 코피가 터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열려 들이닥치는 찬 공기에 깜짝 놀라며 문 쪽을 쳐다보았다. 마주 섞이는 시선 사이로 공기의 온도보다 더 낮은 정적이 흘렀다.

 

 “뭐 도와줄 거라도……”

 “아녜요, 내가 혼자서 정리하고 나갈게.”

 

 문이 다시 닫힌다. 잠깐의 시간 짤막한 대화였으나 그 전에 있던 한 번의 시선 교환만으로 정황을 읽기에는 충분했다. 누군가의 멋쩍음과 누군가의 허탈함 누군가의 안도 그리고 약간의 미안함, 그 모든 것이 섞여 알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분위기의 혈관을 타고 공간 전체와 전신에 퍼진다.

 

 단절 뒤에도 잠시동안 자리에서 가만히 잠긴 문을 응

 

 


21  

 



 

시하던 아카시는 갑자기 걸음을 떼어 한달음에 벽장으로 향했다. 그가 찾아온 것은 공구함이었다. 우아한, 그러나 그 속에 완연하게 불씨가 피어있는 동작으로 덮개를 열어젖힌 그는 안에서 망치를 꺼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씨를 겉잡을 수 없는 불꽃으로 키워내더니 샤워실 옆에 위치한 침실의 문고리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규칙적인 팔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말끔하고 표정은 더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상스레 광기가 스며 있었다. 고상한 모습에 파괴적 행동, 부조화에서 느껴지는 소름 끼침. 키세는 그토록 자신의 감정을 날 것으로 내어놓는 아카시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분노를 참는 쪽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가 내는 화는 어디까지나 세련되게 정제된 분노의 표출이었으며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이렇게나 파괴적이고 분별없는 분노를 터뜨리는 아카시는 처음이었다. 그는 문고리가 너덜너덜해져 문에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반복해 내려치고 다음의 장소로 이동했다. 기본적으로 혼자 사는 집이어서 방

 

 


22  




 

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욕실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 다음의 희생양으로 그 방을 택한 것은 단지 우연만은 아니었으리라. 그가 다음으로 선택한 곳은 음악 작업실이었다. 단번에 요령이 붙어 문고리를 부수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금새 손잡이를 파괴한 그는 잠금장치 없는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카시의 행동 일체를 홀린 듯 바라보며 방치하던 키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이때였다. “아카싯치!” 다급하게 불린 이름에 행동이 멈칫한다. 키세는 찰나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신디사이저 위로 높게 쳐든 아카시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잔머리를 굴려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빠르게 말을 골라냈다. “소리가 너무 커요. 유즈하랏치가 듣고 놀람다.” 부드러운 말과는 다르게 팔을 붙든 힘은 작지 않았다. 망치를 든 팔이 행동을 저지당한 상태로 느리게 내려간다. 그러나 아카시의 시선은 그 뒤로도 잠시동안 건반에 머물러 있었다. 노려보는 눈빛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단 몇 초였는데도 영원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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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긴 숨을 내쉬며 아카시의 눈이 감겼다. 눈꺼풀을 내려 시각을 차단한 채 기계로부터 몸을 돌려 나온다. “시끄러웠겠네. 고마워, 료타.”* 그는 고마움보다는 차라리 미안함이라고 하는 것이 더 가까울 감정을 담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라고는 사용된 단어를 제외하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를 않아서 키세에겐 그 말이 꼭 ‘저 망할 기계를 부숴야 했는데’ 처럼 들릴 정도였다.

 

 아카시의 파괴행위는 어떻게든 멈췄지만 상황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긴박감에 잠시 잊고 있던 유즈하라와 마주한다는 문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지혈을 마친 그녀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을 만큼 조용히 거실로 나와 있었고 고개는 그들의 쪽으로 향해 있어 곧바로 아카시와 대면하게 되었다. 첨예한 기류가 시선 사이로 흘러 불편감을 조성한다. 방금 작곡기계를 부수려던 아카시의 모습을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각주: 인격이 하나로 합쳐진 이래로 아카시는 친우들을 다시 성으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간혹 기분상의 문제 등 일부 경우에는 이름으로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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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몰라도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머리를 식힌 듯한 아카시는 자신의 행동에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되려 그가 아직 냉정해지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방이 잠겨 있으면 도울 수 없으니까,”

 

 ―그래서 문고리를 모조리 부수고 다녔다, 그것이 유즈하라에게 어떻게 느껴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을 저지른 아카시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과한 행동이었다. 만일 아카시가 평소처럼 완벽히 냉정한 상태였다면 되지 않는 변명을 내놓을 바에야 차라리 제가 이성을 잠시 잃었음을 시인했을 것이다. 유즈하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마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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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까지 과보호해줄 필요는 없어.”

 

 차가운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직설적인 거절의 단어가 아카시의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다. 아카시와 유즈하라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다, 유년의 가정사에서 비롯된 상처를 헤집지 않을 것. 유즈하라의 경우 그것은 가문의 이름 하에 받은 불합리한 교육과 지나친 구속이다. 아카시는 이를 유즈하라 본인 이상으로 싫어했다. 트라우마적 습관 등 교육이 남긴 흔적들을 고쳐보려 애쓰기도 했을 정도니, 아픈 부분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혹시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조금이나마 그 아픔에 상처를 더했다면 바로 자존심을 낮추고 그녀의 마음 상태를 살필 만큼이나 그는 조심스러웠다. ‘과보호’는 이런 아카시를 정면으로 타격하는 단어였다. 너로 인해 구속감을 느낀다는 의미를 에둘러 표현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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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까지는 상황이 이쯤 흐르고 나면 아카시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전과 다르게 지금은 두 사람, 특히 오늘만큼은 아카시의 심적 여유가 많이 부족했다. 그는 뜨거워진 자신을 아직 가라앉히지도 못했고, 제 감정을 어른스럽게 누를 만큼 강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발,”

 

 예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포장 없이는 좀처럼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아카시가 약해진 짐승이 위기 앞에서 공격성을 드러내듯 있는 그대로의 바람을 터뜨렸다. 아주 드물어 거의 처음 본 듯한 그 모습은 마치 투정과도 닮아 있어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는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이번에 움츠러든 쪽은 유즈하라였다. 일반적으로 보여 왔던 그의 태도들과는 다른 지금의 모습, 그리고 ‘제발’이라는 단어에서 표현되는 약해진 아카시의 고달픔이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고스란히 심장에 전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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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간절함을 표하는 단어 뒤에는 깊고도 흰 공백이 자리했다. 끊어진 말의 틈새로 저릿하도록 떨리는 숨을 내쉰다. 이어지는 말은 느리고 애절하게 흘러나왔다.

 

 “그냥 일찍 자면 안 돼?”

 

 새벽은 유즈하라에게 자주 창작의 시간이었다. 요 근래는 더더욱 하루의 마지막을 작곡과 함께했으니 말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 빌어먹을 작곡 좀 그만해. 그의 눈빛은 붉다 못해 검은색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을 느낌에 남다른 유즈하라는 그 뒤로 감춰진 푸른 빛의 애상을 감각할 수 있었다. 청색의 원석을 아름답게 가공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검붉게 변색시키고만 있는 망가진 그 또한 보였다.

 

 “내가 너를……, 망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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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즈하라는 다정하지만 슬픈 목소리로 미소 지었다. 미안함과 처연함이 깃든 표정이었다. 해쓱한 손을 뻗어 아카시의 얼굴을 감싸는 몸짓은 따스하고 포근했지만 볼에 닿은 온기는 미약했다. 냉한 손끝에 정신이 맑게 깨는 듯 했으나 이미 얼음은 녹았고 유리는 깨진 뒤였다. 그녀는 투명하도록 새하얀 손끝을 거두고 침실로 들어가 웅크려 누웠다. 그 일련의 동작은 너무나도 부드러워 마치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고 시작과 같이 내내 평화로웠던 하루가 끝나 저녁이 되어 잠을 청했을 뿐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을 정도였다. 정자세로 바로 눕지 않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웅크린 모습만이 겉으로 보인 유려함과 정반대로 내면에는 상처받은 심정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감정의 혼란 속에서 멍하니 서 있던 아카시는 원대로 제 말을 따라 취침에 든 탓에 사과할 기회도 잡지 못하고 대화가 단절되어버린 연인의 곁으로 비척비척 향했다. 키세는 사랑으로 인해 생기는, 타인들은 상상도 못 할 아카시의 모습들을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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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좋아했으나 이번만큼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카시를 보기 싫다는 양 벽을 향한 그녀의 자세는 깊은 잠으로 뒤척이다 바뀔 수 있을지라도 오늘의 기억들은 거친 감정의 굴곡과 예외의 연속이어서 도저히 잊기는 쉽지 않을 테다. 키세는 여기저기 즐비한, 그 이례적 모습들이 만들어 낸 부서진 것들의 잔해를 치우고 나서 울리는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가족임다.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아, 그래. 난 내일 낮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여기서 조금 더 머무르려고.”

 “내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함다, 그치만 너무 늦게 자진 마십셔.”

 

 딱 봐도 밤샐 모양이라 말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려는 듯 가벼움이 섞여 있었다. 들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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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아카시의 목소리도 전과 비슷해져 약간은 온화함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끝난 줄 알았던 대화에 키세가 다시 운을 뗀다. 조심스러운 화제인 듯 머뭇거리는 모습에 아카시가 허가를 낸다. 말해.

 

 “아카싯치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슴다. 우울에.”

 “…….”

 “두 사람은 다르지 않으니까요.”

 

 우울이란 본래 전염성이 크다. 같은 주파수 비슷한 심장 사이에서라면 더 전파되기 쉬울 것임은 당연하다. “혼자만의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함다.” ―더 심각해지기 전에. 아카시 또한 이를 어렴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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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끼고 있었기에 의견에 쉽게 동의했다. 이번 같은 심정의 큰 변동을 겪고 난 뒤라면 더욱이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내일 하루 동안 유즈하랏치는 제가 담당하겠슴다.”

 

 키세가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난 사람의 빈자리만큼 조용해지자 방 안에서 제 것이 아닌 규칙적인 숨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깊은 수면이 자아내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이제 그는 적막 속에 혼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카시는 그 씁쓸하지만 편안한 고요 속에서 유즈하라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침대에 누워 이른 잠을 청한 것인데도 그녀는 잠에 푹 잠긴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동안 잠이 어려웠던 사람이 이토록 곤히 잠들 수 있는 것은 조금 전 받은 스트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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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힘들어 나타난 도피성의 수면을 기회로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쏟아져 만들어진 결과일 테다. 게다가 유즈하라는 제 사랑에 있어서는 모진 사람이 되지 못하기에 힘들어하던 아카시를 위하는 마음으로도 잠에 들었겠지만, 죄책감에 젖은 그가 이를 파악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카시의 시선은 미동 없이 오래도록 유즈하라에게 머물었다. 아직은 집집마다 말소리와 함께 단란한 분위기가 감도는 초저녁이 저물어, 아주 간간이만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깊은 한밤중이 되고, 이어서 끝없이 깊고 어두운 새벽으로 흐를 때까지. 유즈하라 또한 그동안 내내 잠들어 있었다. 어찌나 깊게 잠들었는지 뒤척임이라고는 중간에 자세를 한 번 바꾼 것밖에 없었다. 움직임 없이 곤히 잠든 이에게 어슴푸레한 신새벽 달빛이 비쳐 피부가 희게 물든다. 그 모습은 영원한 잠을 닮아 있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이가 문득 불안을 느껴 손길을 낸다. 기분만으로의 행동이란 현 상황의 그에게 퍽 어려운 일이었기에, 뒤척임으로 인해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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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바깥으로 나온 손을 안으로 넣어 주는 것을 핑계 삼아 살며시 손목을 쥐어 보았다. 가녀린 손목이 한 손에 들어오고도 남아 중지 첫 마디를 훌쩍 넘기도록 감긴다. 부드럽고 창백한 살갗 아래로는 온기가 있어 그녀가 아직 이승에 속해 있음이 느껴졌다. 유즈하라의 몸은 온도에 민감했다. 전혀 춥지 않은 여름인데도 온도가 약간만 내려가면 금새 손발이 차갑게 식곤 했다. 지금도 새벽이 되어 공기가 차졌으니 냉기가 돌아야 했으나, 그녀의 손목은 깊은 잠으로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혈관이 비치는 엷푸른 피부 아래 울컥이며 흐르는 피와 맥박. 여린 손목에 깃든 생명의 온도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카시는 유즈하라의 생을 감각하듯 얇은 손목을 쥐고선 어루만지다 별안간 먼 곳으로 손을 뻗쳐 그 안에 목을 담는다. 손가락을 단단히 감았던 손목과는 달리 이곳엔 그저 손가락을 모아 살며시 얹어둘 뿐으로, 목에는 조금의 압박도 가해지지 않는다. 손목과 목은 그 이름만큼이나 유사성이 있다. 차이라면 한 손에 담기지 않는 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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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하게 느껴지는 맥박과 몸의 말단부보다 더 뜨거운 체온, 더 확실히 느껴지는 생기 정도. 얕게 얹어진 손으로도 생의 감각은 선명하게 느껴진다. 멍한 목소리로 사색할 때에는 사향死香이 짙게 느껴지는 사람인데도, 달빛 아래 눈을 감은 창백한 형상은 생에 초연한 듯 생경한 분위기인데도. 은 시각과 촉각의 온도차에서 문득 섬칫함을 느낀다. 동시에 제 손 아래 고스란히 놓인 날것의 생명에 갈증도 느낀다. 저와 같은 붉음을 품고 있는 울컥이는 것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면 생사生死의 유리遊離 또한 사라져 하나가 되겠지 그건 어쩌면 존재()로서 비존재()를 품고 있는 현재의 보다 더욱 안정된 형태일는지도 모른다. 유체流體주1 의 유체柚體주2 가 유체遺體주3 로 변한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 아득해져 은 눈을 감는다 사랑하는 이의 유해주4에 대한 생각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피로한 눈꺼풀이 붉게 타오른다…….

 

 

각주 1: 기체와 액체 등 유동성이 있는 물질, 유즈하라의 속성적 비유

각주 2: 유즈하라(柚原)의 신체   각주 3: 시체를 달리 이르는 말

각주 4: 시체·시신의 동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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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거운 아픔이 배인 눈꺼풀을 내리감고 손가락을 톡톡 건드리는 심박에만 집중한다 시각이 차단되니 赤黃色으로 터지는 불빛들 사이에서 온갖 상념이 스쳤다 스러진다 死香이 손끝에 맴돌다 음악의 환상을 보기도 한다, 음악!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 집착을 만드는 자 전에는 없던 증오가 향하는 대상 그리고 연인의 또 다른 연인 제 삼의 사랑 숨, 은 문득 예술가는 꼭 사랑같이 언제든 갑작스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자유를 손에 넣으라 부추긴 데에 대한 후회가 잠시 생긴다 다리를 꺾어 음악과 닿지 않게 하면 세상에 발을 붙이고 한평생 살아갈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너정말진짜너무사랑해그런데내곁에없는너는조금미워 어차피 생각뿐 그녀에게서 음악을 빼앗을 수는 없겠지만. 음악 없이는 시들어버릴 것이 피차일반으로 뻔하니.

 

 체념으로 비통하게 얼룩져가는 상념을 깬 것은 연인의 뒤척임이었다. 사내는 혹여 무의식 중 손아귀에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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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그녀의 숨길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든다. 눈을 뜨고 손을 떼고 편안해 보이는 연인의 표정을 확인하고서야 안심과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멀리 가지 못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날 뿐인 그의 뒤에 벽이 닿이고 이대로 등을 미끄러뜨려 바닥에 앉는다.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돌리니 그제야 바깥에서 실내로 비쳐 들어오는 빛이 보인다. 창 너머로는 희끄무레한 푸름이 돋고 있었다. 푸르게 트는 동이 방을 가득 채운다. 서양에선 푸른빛이 우울의 동의어라는 것이 떠올라 조소했다. 두 사람을 끌어안는 *파랑을 느끼며 이제 잠시 눈을 붙이고자 한다.

 

 * 우리는 그것이 순우리말의 색조 파랑인지 망망대해에서의 파랑波浪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악화되어가던 유즈하라의 정신상태가 절정을 찍었을 때, 키세는 아카시에게 물었다. 대체 이 지옥은 언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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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느냐고. 아카시는 분명 키세보다 유즈하라의 우울을 더 많이 경험했다. 그녀는 키세와 사랑을 시작한 시점부터 우울감의 정도가 줄었을뿐더러 이전보다 더욱 티 내지 않으려 신경 썼기 때문에, 안 그래도 아카시보다 유즈하라의 우울을 읽어내기 힘든 키세는 그것들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우울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아카시도 이번만큼 거센 부정적 감정의 범람을 경험한 일이 없었다. 정확한 예상이 불가했기에 그는 다만 과거의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느껴질 때 멈췄었지.”

 

 아카시가 기억하는 우울의 순간들은 지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감정을 겉으로 티 내지 않고 평소와 같이 정상적으로 영위해가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왠지 모르게 죽음에의 의혹이 느껴질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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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리고 이유 모를 의구심이 계속되어 본격적으로 걱정이 들 즈음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넘쳤던 감정의 수위는 다시 낮아져 있는 것이었다. ‘내 경험을 들어도 도움은 되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아카시는 덧붙이려 했으나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보다 먼저 나온 키세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말문을 막아섰기에.

 

 “그러면 지금 당장 끝나야 하는 거 아님까? 정말,”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데. 떨리는 그의 안에는 연인에 대한 걱정과 애틋함이 가득했다. 혹여 제 사랑을 잃게 된다면, 하는 만일에의 두려움 또한 정말 희박한 가능성인데도 불구하고 강한 감정으로 자리 잡아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었지 나는 사랑들을 잃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그건 비단 유즈하라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키세도, 아카시도, 우리들은 모두 사랑을 잃으면 죽고 만다. 당신은 내 구원이요 세계이자 숨, 그대의 생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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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나의 생명. 유즈하라의 목숨에는 두 사람분의 생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유즈하라에게 있어 최대의 고비였고 어제는 모두에게 있어 위기의 최고 정점이었을 것이다. 감정의 너울을 보인 아카시나 그를 받아낸 유즈하라와 키세 그 누구랄 것 없이 우리 전부. 워낙 큰일을 겪고 나서인지 다음날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하루 내내 혼자만의 휴식을 가진 아카시는 그날의 격정은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완벽하게 본래의 냉철한 아카시로 돌아왔다. 유즈하라는 충분한 시간 숙면을 취했으며, 이른 저녁부터 잠을 청했던 만큼 평범한 오전에 기상했다. 정상 범주의 시간에 깨어나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밝은 아침을 맞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자 찾아온 키세는 이른 시간에도 이미 일어나 있는 유즈하라의 모습에 반색하며 낮 데이트를 청했다. 햇빛을 받으며 산책을 하고 세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 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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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먹으며 시가지를 돌아다니는 내내 그들에겐 행복만이 넘쳤다. 오늘만큼은 유즈하라에게서 슬픔의 기색이나 억지로 기쁨을 꾸며내는 느낌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전일의 소란이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묵은 감정들을 한 번 씻어내리는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하긴, 영혼의 반쪽과도 같은 아카시의 원을 들어준 데에서 오는 만족감을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키세는 데이트의 마지막에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병원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처음 정신과 진료 예약을 언급했을 때 거부감 없이 승낙했던 만큼 진찰은 순조로웠다. 비록 진단에 대해 들은 것은 상담자 본인뿐이라 키세는 그녀의 병세에 대해 듣지 못했으나, 상황이 나쁘지는 않은 듯한 느낌의 말을 의사에게 전달받았다.

 

 의사가 넌지시 전해주었던 대로 유즈하라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었다. 우선 잠을 잘 자게 되었고 취침시간과 기상시간도 점점 앞당겨졌다. 이에 따라 건강상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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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지는 듯 했고 우울감의 표출이나 멍해지는 순간들도 줄어들었다. 약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확실히 좋아진 모습이었다. 우울이나 부유감이 줄었다 하여 그 공백에 다정만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냉정하고 무표정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유즈하라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병에 마음이 시달려 감정을 꾸며낼 여유가 없기에 자신이 믿는 두 사람 앞에서만이라도 힘들여 연기하지 않는 것일 뿐으로,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인들은 지금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의 진정한 그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특히 유즈하라의 여러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키세는 이를 오히려 좋아했다. 다만 하나 걸리는 점이라면 파괴적인 창작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유즈하라는 요새 작업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드는 일이 잦아질 정도로 작곡에 몰두했다. 연인들은 걱정하면서도 그녀가 의사의 조언을 무시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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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기에 허용범위 내에서 조절 중이리라는 믿음으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러나 단지 어련히 알아서 잘 하려니, 하는 신뢰감만으로 나온 결정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즈하라의 작곡 행위에서 우울을 음악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부정적 감정을 소모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요컨대 곡에 모든 감정들을 쏟아내어 불사름으로써 우울의 기복도 적어지고 잠도 일찍 자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의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그들은 현 상황의 균형을 경솔하게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제지(制止) 없는 밤들이 흐르고 달과 함께 곡도 완성으로 차올라갔다.

 

 끝은 예상보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녀의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설마하니 그 사건으로부터 열흘도 되지 않아 넘치던 우울의 기색이 완연히 잦아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다. 이렇게나 금새 끝나버릴 일에 우리가 그토록 고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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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휘둘렸는가. 제방 안쪽으로 말끔히 가둬진 부정적 감정들을 보고 아카시는 조금은 허탈감이 섞인 안도의 웃음을 내었다. 그의 허망함은 비단 맥없이 끝났다는 것에서만 기인된 것은 아니었다. 내내 열려 있다가 오늘에서는 깔끔히 닫힌 작업실의 문이 오히려 허탈에의 더 큰 원인이었다. 작곡이 끝난 것이다. 우울의 종결과 동시에. 오랜만에 주인의 손길로 깨끗하게 정리된 집에서 거실의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세 시의 햇살을 받으며 아침부터 여유를 가지고 준비된 다과를 들고선 아카시는 스치듯 말을 흘렸다.

 

 그날의 내 분노가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렇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돌아보는 얼굴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은데.” ―어차피 예상하고 있는 대로겠지만. 아카시의 발화에 키세의 동조적 기다림이 얹어지고, 유즈하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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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말예요, 로 운을 떼며 그간의 설명을 시작했다.

 

 말인즉슨 요약하자면 이렇다. 유즈하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데 뛰어난 사람이다. 이는 예술가로서는 더없이 좋은 요소임이 틀림없지만, 이번만큼은 감정동화라는 탁월한 재능이 해가 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번 앨범의 메인 테마를 우울로 잡았다. 그래서 우울의 감정을 짙게 담아내기 위하여 며칠 밤낮을 그에 관련된 것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그녀의 마음은 빠르게 부정적 감정들로 채워졌고 때마침 시기적절하게도 가끔 찾아오는 그녀 자신의 우울 또한 이와 함께 들이닥쳤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그녀는 자신의 우울을 창작에의 원동력으로 쓰려고 했다. 굳이 우울 사고를 막으려 들지 않았고 혹여 일이 심각해진대도 본인이 감정을 제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 그것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뒤의 흐름은 모두가 겪은 바와 동일했다. 우울의 수렁 속에 발이 묶여 점점 깊게 빠져들어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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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유즈하라. 결국 작곡을 최대한 빨리 끝마치며 의학의 도움을 받아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고집이 너무 무모했던 거 아님까?”

 

 해결돼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는데.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유즈하라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아카시는 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 농담조로 자신의 계획을 전했다.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이건 딱 자르듯 끝나는 게 아니니까 술은 아직 다시 채워 넣지 않을 거야.” 이어지는 웃음 섞인 긍정의 대답. 그렇게 그들의 연애 사상 최대의 위기는 무사히 지나갔다.

 

 저녁, 헤어지는 길에 들이마신 공기는 해방감으로 달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착잡함에 들이쉬는 숨이 답답했는데. 마음에 따라 변화하는 주변이 새삼 신기하다. 살면서 언젠가는 이 답답함을 다시 겪게 될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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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겠지. 음악을 놓지 않는 한 커다란 우울은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것에 손을 뻗는 연인을 자신들은 막을 수 없을 테니.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카시는 깊은 숨을 마셨다 내쉬고선 느즈막한 저녁의 고요를 깨듯 키세에게 말을 건넨다.

 

 “다시 한 번 겪는대도 견딜 만할 것 같아.”

 “제정신임까?”

 

 곧바로 놀람으로 커진 키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날아든다. “그거 아카싯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며칠 전의 그 날을 떠올리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이야기에 아카시는 그저 미소를 짓는다. 그래, 혼자라면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즈하라의 곁에 있는 사람은 하나가 아니니까. 네가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할 수 있고, 내게 부족한 것은 네가 채워줄 테다. 하나의 불가는 둘이어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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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미친 놈이지.”


 아카시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웃음을 짓는다. 키세는 그에게 딴죽을 걸지 않는다. 아마 이 순간, 유즈하라의 연인들은 마음이 통한 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하지만 사랑은 원래 미친 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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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 = melancholy

藍色深淵

愛色 = あいい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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